Our Poet of the Month interview with Kim Yideum was conducted with the generous help of Ji Yoon Lee, who translated Katy Lewis Hood’s questions into Korean and Kim Yideum’s responses into English. Kim Yideum’s original answers are reprinted below. Click here to read the entire interview in English.
Your poem ‘Country Whore’ includes a very memorable image of poetic inspiration, in which the dreaming poet performs fellatio on the devil before waking up with a pen in her mouth. This link between the sexual and the textual is not just a modern phenomenon; it has roots in the long history of kisaeng in Korea. Do you think that female and male poets have different relationships to writing, both historically and now?
저는 여성 시인의 시와 남성의 글쓰기뿐만 아니라 사유체계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접촉하는 조건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남성들은 기존의 남성중심사회 언어로 사유의 깊이를 내세우며 고상하고 논리적인 태도를 표방할 수 있겠지만, 여성은 자신의 언어를 획득하기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남성이 사유 이후에 글을 쓴다면 여성은 그 사유 과정 혹은 사유 이전에 자궁, 젖가슴, 눈물, 피같은 육체의 언어로 글을 쓰지 않을까요?(여기서 ‘사유라는 개념은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In 2006, Don Mee Choi wrote of the scarcity of feminist criticism on Korean women’s poetry. Given that you’ve written your own thesis on Korean feminist poetics, how do you think this has changed in the last ten years?
최돈미 선생님의 지적이 합당합니다. 제가 박사논문을 쓸 때에도 ‘한국 페미니즘 시 연구’라는 주제에 관해 학계에서 비호의적이었고 지금까지도 페미니즘 연구와 비평이 철 지난 패션(유행이 끝난 문제)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제가 올해 초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페르소나로 하여 쓴 시를 비평가들은 예술미학을 거론하며 여성과 정치적 색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지 않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한국에서 ‘문단 내 성희롱 성폭력’ 문제가 드러나서 다시 페미니즘 의제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현실적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시와 관련된 작품 탐구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A poem such as ‘Fluxfilm No. 4 (Lesbian)’ is at once surreal, impassive, paranoid, funny, and grotesque. How do you achieve the right balance between employing multiple tones and registers and developing a distinctive poetic voice?
단일적이거나 이분법적인 언술 방식은 문서나 법률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요? 세계가 지닌 폭력과 공포 앞에서 나는 그 불안과 슬픔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자연스럽게 ‘초현실적이고, 불감증 적이고, 편집증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또 그로테스크’할 겁니다. 비명소리, 광기, 냉소 등이 있고요. ‘밸런스를 맞출’ 의지는 없습니다. 균형잡기에 소질이 없고 과도하거나 치우치거나 일그러지는 것, 흘러넘치는 것, 부서지는 것, 사라지는 것들을 내버려둡니다. 그것은 제 목소리나 호흡처럼 일부러 의도하지 않은 것인데, ‘여러 목소리’가 나는 것은 시를 쓸 때 갑자기 끼어드는 다른 주체의 목소리가 있고 다수의 화자가 대화적 다성성을 보이면 그것을 삭제하지 않고 시에 쓰기도 합니다. 또한 시를 쓸 때 기억의 ‘순간 이동’이 생겨서 신(귀신)들린 상태, 정서적 격랑을 겪기도 합니다. 음…. 뭐라고 딱 표현을 못하겠는데… 저는 답변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질문하는 태도로 시를 씁니다. 시는 자유이고 “이렇게 써라”는 걸 배우기 싫어하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A lot of your poetry feels quite idiomatic and colloquial. Do you write with only a Korean audience in mind, or does the prospect of translation come into your writing practice from the beginning?
솔직히 저는 구어체나 비속어 같은 ‘시적 언어’가 아닌 언어로 치부되어온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 속에는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부모나 선생, 경찰도 없으니까. 시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합니다. 시를 쓸 때 독자를 염두에 두고 시를 쓴 적이 없습니다. 비평가의 조명도 염두에 두지 않아요.
저는 처음부터 밑바닥에서(작은 시골도시에서 스승이나 문학아카데미그룹 없이 혼자서) 시작했으며 처음에(습작 시절부터) 시를 쓸 때 ‘누가 내 시를 읽겠어. 누가 읽어봐야 저번처럼 험담이나 하겠지. 그래도 나는 쓰겠어’ 그런 생각으로 껄렁하게 독백하듯이 넋두리하듯이 쓴 게 습관이 되었나? 모르겠네요. 창작의 순간에는 컴컴하게 내면과 언어에 집중합니다. 둘레가 꽉 막혀서 소리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번역의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세계작가축제를 통해 액션북스의 요하네스를 알게 되었고 이지윤 번역가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하기 쉬운 시도 아니고 한국어의 동음이의어(가령, 사과:사과하다 같은), 은어도 많이 사용하거든요. 요사이에는 ‘독자나 번역을 신경 써야지’하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별로 신경 쓰거나 고려하지 않습니다.
In ‘Distribution Center’, a poem that addresses international adoption, you write that “this flotsam, which used to be some sort of organism, is quite political…” You’ve also recently spent time interviewing homeless people in Paris. Given the current precariousness of ‘home’ for many people worldwide, how do you see the politics of place and identity informing your work?
저는 스스로 표류자, 난민, 이방인, (소극적) 홈리스라고 느껴요. 저는 실제로 서울에서 월세방(작은 스튜디오)에서 살며 자주 이사를 합니다. 기득권 세력이 아닙니다. 저는 고아나 아웃사이더, 성적 소수자, 홈리스들과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파리에서 홈리스들과 인터뷰할 때도 친구처럼 재미있었어요. 저는 핵가족주의, 국가이기주의를 혐오하고 자본주의 폭력과 차별을 싫어해요. 저는 정체성을 갖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상처와 슬픔을 안고 있지만 다시 기운을 내려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평범한 삶에 존엄성을 갖습니다. 단지 시를 쓸 때만 시인이라는 정체성이 잠시 생깁니다. 저는 ‘장소’라는 벽(경계)을 넘어 흘러가는 물(액체)이나 전염병처럼 어디든지 갑니다. 시와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그곳이 나의 집이고 은신처이고 국가입니다.